1970년대 대전의 가정 성경공부 모임에서 시작해 신앙·배움·돌봄의 공동체로 자라난 한울.
1981년 군사정권의 조작과 폭력 속에서 꺾였지만, 사람들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페이지에서는 한울회 사건의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하늘에서 처럼 땅에서도"의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대전, 홍응표 선생의 가정 성경공부에서 출발. 신앙·독서·토론·봉사로 넓어진 청년 공동체.
홍응표 선생이 떠난 뒤에도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모임과 봉사를 이어감.
군사정권에 의한 불법 연행·감금·협박, 고등학생 허위자백 강요, 6명의 선배 옥고.
진화위, 불법 구금·가혹행위·허위자백 강요 인정. 국가 사과와 재심 권고.
교사로서의 삶. 그는 학생들을 “꽃씨를 품은 사람”이라 부르며 깊이 사랑했습니다. 자신의 단칸방을 “학교 밖의 작은 학교”로 만들어 라면을 끓여주고 『꽃들에게 희망을』, 『갈매기 조나단』 같은 책을 함께 읽고 토론했습니다.
사건의 시작과 고문. 대전의 제자와 동료들이 ‘빨갱이’로 몰려 연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망설임 없이 달려갔다가 그 자리에서 함께 갇혔습니다. 잠 안 재우기와 구타 등 모진 고문 속에서도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라 진술했으나, 수사관들은 원하는 답을 강요했습니다. 결국 검사와 판사는 진실을 알아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거짓 진술서에 도장을 찍었지만, 그들 역시 국가와 한패였습니다.
조작과 신념. 만나지도 않은 김일성을 만난 것으로 꾸며졌고, 사도행전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 신앙은 공산주의 사상으로 왜곡됐습니다.
출소 이후의 삶. 그는 “요시찰 대상자”로 분류돼 평생 감시를 받았고, 신원조회에 걸려 교직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는 신앙으로 버텼습니다. 그는 여전히 국가가 공인한 ‘빨갱이’로 남아 있고, 바로잡히지 않은 역사 앞에서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아름답고 아픈 기억. 한울모임은 그에게 아름다운 이름이자 기억이지만, 40년이 지나도 치욕·분노·공포를 불러오는 아픈 상처입니다.
고문과 거짓 자백. 한밤중 강제 연행 후 폭언과 구타를 당했고, 무엇보다 사실이 아닌 내용을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는” 일이 가장 괴로웠습니다. 몸과 정신이 망가진 끝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술서를 작성했습니다.
평생의 죄책감. 기소유예로 풀려난 뒤에도 대학·군대에서 감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강요된 일이었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거짓 진술로 선생님과 선배들이 고통받았다는 죄책감을 평생 안고 ‘죄인’처럼 살아왔다고 고백합니다.
한울모임과의 만남. 지적 호기심이 컸던 ‘민주’는 홍성환 선생 소개로 모임에 참여합니다. 학교 밖 철학·역사·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며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사건의 조작과 법정 증언. 경찰은 이규호 선배의 졸업 논문을 왜곡해 모임을 반국가단체로 조작했습니다. 협박에 못 이겨 거짓 진술서를 썼으나 첫 법정에서 “경찰에서 진술한 것은 모두 허위”라 외쳤습니다. 곧 다시 끌려가 세뇌에 가까운 심리 압박을 받은 뒤, 다음 재판에선 검사의 말에 ‘네’라고만 답할 수 있었습니다.
치유와 회복의 길. 무기정학과 관계 단절로 ‘봄날’을 빼앗겼지만, 세월이 흐른 뒤 김종생 목사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다. 너는 국가폭력 피해자야”라는 위로를 듣고 오랫동안 묵혀둔 눈물을 쏟아냅니다.
신앙과 방황의 시기. 젊은 날 《사상계》 등을 읽으며 함석헌·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대학 시절 방황 끝에 네비게이토 선교회에서 활동했고, 박재순·홍성환 등 훗날 한울의 주축을 만났습니다.
한울모임의 시작. 그는 경직된 분위기에서 벗어나 자신의 집을 개방해 성경과 고전, 시사 문제를 자유롭게 공부·토론하는 모임을 이끌었습니다.
사건 이후의 자책감. 가정 문제로 서울로 이주한 뒤, 대전의 형제들이 연행됐다는 소식에 큰 충격과 자책을 느꼈습니다. “끝까지 돌보지 못했다”는 마음으로, 국가가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길 지금도 기도합니다.
한울과 뻐꾸기 둥지 공동생활 공간 ‘뻐꾸기 둥지’를 마련해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려 했습니다.
논문 조작과 고문. 미완성 졸업 논문 <현대의 공동체론>은 수사기관에 압수돼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목표로 했다는 혐의로 왜곡됐습니다. 그는 대공분실 지하실 등에서 구타·잠 안 재우기 등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허위 자술서를 반복해서 써야 했습니다.
재판과 옥중 투쟁. 공소장에서 자신이 반국가단체 ‘수괴’로 조작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으나 신앙으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대법원에서 “순수한 신앙공동체”라며 무죄 취지 파기환송이 있었지만, 고등법원에서 다시 유죄가 선고되는 등 ‘핑퐁 판결’의 희생이 되었습니다. 교도소의 비인간적 처우에 맞서 단식 투쟁을 벌이다 징벌방에 갇히는 등 옥중에서도 인권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석방 이후. 1983년 특사로 풀려났으나 출소 직전까지 ‘사상 전향서’ 작성을 강요받았고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이후 사회안전법 폐지를 위해 싸우는 등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으나, 고문 후유증과 긴 투병 끝에 2021년 작고했습니다.
한울에서의 성장. 수줍은 시골 학생이던 그는 형을 따라 ‘뻐꾸기 둥지’에 갔고, 서로를 존중하는 자유로운 토론 속에서 정신세계가 새롭게 구축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국가 폭력과 결심. 고문으로 쇠약해진 형을 밤새 안고 울며 비인간적 국가 폭력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 제대 후 학생운동에 투신했습니다.
국가적 손실. 그는 한울이 선과 진리를 추구한 지적·감성 공동체였고, 국가 폭력으로 무산된 것은 “값으로는 도저히 따질 수 없는 국가적 손실”이라 말합니다.
인연과 참여. 요양 중 홍응표 선생을 다시 만나 한울에 참여, 방학마다 내려와 설교·강의를 하며 교류했습니다.
전개와 재심 노력. 올바른 정신을 가진 이들이 군사정권을 비판한 것은 당연했다며, 어린 고등학생들이 협박으로 거짓 진술을 하게 강요돼 자신을 포함 6명이 옥고를 치렀다고 증언합니다. 2010년 이규호 선생과 재심을 청구했으나 기각, 2차 진화위 권고에 따라 다시 재심을 신청했지만 법원은 1년 넘게 결정을 미루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만남. 시골에서 어머니와 살던 그녀는 조덕형 전도사를 통해 한울을 알게 됩니다. 버스비를 마련해 참여했고, 인격적 존중 속에 새로운 가치관과 지식을 접하며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조사와 당당함. 친구들이 연행된 줄도 모른 채 조사를 받았고, 경찰이 “이규호가 모임을 주도했다”, “연락 오면 신고하겠다”라고 쓰라 강요했지만 “‘지도’와 ‘주도’는 다르다”며 끝까지 ‘주도’라고 쓰기를 거부, “집에 못 가도 그렇게는 못 쓴다”고 맞섰습니다.
삶의 방향. 이후 교정 공무원이 돼 선배들을 돕겠다는 꿈을 품고 실제로 교도관으로 일했습니다. 그녀에게 한울은 맑은 샘을 길어 올리게 해 준 ‘마중물’이었습니다.
단편적 기억. 홍성환 선생을 멋진 분으로 기억하며, 한울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삶의 방향을 찾았다고 회상합니다.
사라진 기억. 처음 조사에선 구타·폭언이 없었으나, 며칠 뒤 대전경찰서에서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검찰 증인으로 나간 걸 보면 불리한 진술을 했을 텐데, 무엇을 어떻게 강요받았는지 기억하지 못한 채 40년 넘게 고통받습니다.
진실에의 갈망. 자신의 진술서를 보고 싶고, 거짓 증언이 있었다면 엎드려 용서를 빌고 싶다며 “그날의 진실”을 간절히 호소합니다.
고난 속의 만남. 지병으로 힘들던 시절, 한울의 공동생활 ‘뻐꾸기 둥지’에서 육체·정신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교사의 신념. 김교신 같은 참 스승을 꿈꾸며 독서회를 열고 소통했습니다. 박정희 시해 당시 수업에선 『줄리어스 시저』의 브루투스 연설을 인용해 시대를 비판적으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연행과 고문. 한울 형제들이 연행됐다는 소식에 대전으로 달려갔다가 불법 감금, 집단 폭행을 당했습니다. 공소장의 “정부 전복 결의” 같은 문구를 보며 사건의 터무니없음을 절감했습니다. 집행유예 후 교단에 설 수 없게 되자 신학을 공부했고, 사면 복권 후 다시 학교로 돌아가 평생 교사로 살았습니다.
진리를 향한 갈망. 20대의 깊은 갈증 끝에 신학에 입문, 네비게이토에서 홍응표 선생을 만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정신의 그루터기. 한울에서 스승과 동료들을 만나 방황을 끝내고 정신적 안정을 찾았습니다. 한울은 그의 정신적 고향이자 그루터기였습니다.
사건과 그 이후. 군사정권에 의해 모임이 짓밟힌 데 대한 분노와 슬픔, 수사 과정의 폭력·고문과 옥중의 고통을 증언합니다. 이 사건은 그를 “상처 입은 치유자”로 만들었고, 지금도 한울은 길을 비추는 “등불”입니다.
외로움 속의 안식처. 불우한 어린 시절, 한울은 유일하게 따뜻한 기억을 남긴 공간이었습니다. 서울로 대학을 간 지 2주 만에 형제들이 그리워 ‘뻐꾸기 둥지’를 찾았고, 그 자리에서 함께 연행됐습니다.
수사와 조작. 잠 안 재우기와 심리전으로 시달렸고, 수사관이 짜놓은 각본대로 자신이 ‘선전부장’으로 조작됐다고 말합니다. 먼저 풀려난 것에 대해 감옥의 선배들에게 미안함·부끄러움을 느끼며 우울증·공황장애를 겪었습니다.
국가의 사과 요구. 졸업 후 10년간 형사들의 지속적 감시와 방해로 20~30대를 고립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무너뜨린 국가로부터의 공식 사과는 국민으로서 “최소한의 권리”이며, 대한민국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진리의 실험장, 한울. 한울은 “삶을 바꾸는 진리의 실험장”이었습니다. ‘뻐꾸기 둥지’ 공동생활은 이타적 삶의 가치관을 형성하게 했습니다.
군인 신분과 고문. 방위병 복무 중 연행돼 군 보안부대로 이첩, 혈흔이 낭자한 지하실에서 극심한 고문·가혹행위를 당했습니다.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할 만큼의 고통 속에서도 옥중에서 재소자들을 위로하며 목회자의 소명을 다했습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 국가가 조작한 사건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이 경험이 그를 “상처 입은 치유자”로 만들어 사회의 약자들과 함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울, 삶의 등대. 청소년기의 고민에 답을 준 홍응표 선생과의 만남, 한울은 삶을 비추는 등대였습니다.
사건의 전말과 ‘핑퐁 판결’. 모임이 반국가단체로 날조된 과정, 대법원의 무죄 취지 파기환송에도 고등법원의 유죄, 이후 대법원이 스스로 뒤집어 유죄 확정에 이른 ‘핑퐁 판결’의 부당함을 지적합니다.
재심 촉구. 2010년 재심 기각 후, 2023년 진화위 권고에 따라 다시 재심을 청구했으나 법원은 계속 결정을 미루고 있습니다. 그는 호소합니다 — “제발 하루속히 재심이 이루어져서 공산주의자라는 질기고도 무거운 멍에를 벗겨 내 주십시오.”